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시대 사회의 창 / 세 번째 이야기/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뜬지 올해로 10주년.....
아직도 우리의 귀에 울림으로 남아 있는 천시인의 '귀천' 이라는 시는 '인생을 소풍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행복하게 살다 하늘로 가고 싶다' 는 작가의 의지가 담긴 '인생의 노래' 로 알려져 있다.
@ 천상병은 천상시인, 우리 문단의 마지막기인,(奇人)
천상병[千祥炳] 시인, 호는 心溫(심온)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렸던 고인은 '새' '귀천(歸天)' 등을 남기고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1930년 출생하여 서울대 상대를 수료하고 1952년 '문예'지에 시 추천 및'현대문학'지에 평론 추천을 받았다. 시집으로 '새' '주막에서' '귀천''천상병은 천상시인이다'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등이 있고 평론·수필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가 있다.
경남 창원(昌原)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 받았고, 1952년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공작댄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 올해 10주기 다시 돌아보는 천상병 연보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 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 시가 나를 찾아왔다, 모른다.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다.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중에서
1967년 7월 14일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 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렸었는데,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 화가 이응로(李應魯),재독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으로 확대, 조작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 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한 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 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그를 국사법으로 둔갑시켜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 부터도 막걸리 값으로 5백원, 1천원씩 받아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 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터뜨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 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 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고 한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는 것이다.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 고문후유증으로 정신병원 다녀오고 끝내 아이도 못 낳아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 잿빛의 얼굴, 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 반복적인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라고 문학평론가들은 밝히고 있다.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에는 천상병<중>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시 '강물' 등을 '문예' 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 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 살아있는데도 죽은줄 알고 친구들이 유고시집 내줘
그는 이 때 '현대문학' 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 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 시집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 악의 없는 '갈취범'...천상병 그 천진무구함과 무욕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 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그는 그의 생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천상병 그는 '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해 시를 썼다' 는 것이 문학평론가들의 지적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에 따르면 천상병은 "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그는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시 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 목순옥과 결혼
장석주는 그를 이렇게 떠올리고 있다. 그는 "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라고.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씽씽 바람 불어라"("나의 가난은") .
천상병 시인은 지난 1972년에 병간호를 해주던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목순옥은 대학 때 친구 목순복의 여동생이었다.
그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는데 그는 목순옥의 따듯한 보살핌을 받으며 마침내 원기를 회복,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때로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년간 계속되었다.
@ 찻집 귀천歸天 은 지난 1985년 관훈동 23번지에서 시작
천상병 시인은 술과 담배, 친구를 좋아하는 그의 성품으로는 결혼 생활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난 1985년 목순옥은 서울인사동 골목에 작은 찻집을 열었고,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찻집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천상병 시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이 찻집의 옥호를 '귀천歸天'이라 불렀고, 이들 부부는 서울 북쪽 교외로 나가 의정부에 있는 낡은 가옥의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냈다. 그리고 지난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게 하지만 순진무구 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 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가 나오고, 세 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 이 간행되었다.
@ 진짜 유고시집은 1993년에 나와,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는 인사동하면 사람들은 귀천을 떠올렸고, 귀천 하면 인사동이 저절로 떠올려 졌었다.
그리고 18년의 세월이 지나서 지난봄에 귀천2 가 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확한 주소는 귀천1이 있는 곳은 관훈동23번지이고, 올 봄에 오픈한 귀천2 는 관훈동83번지이다.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볕이 모처럼 쨍하게 비췄던 지난 8월21일 오후 서너 시경, 단아하게 단장된 매장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의 수줍은 소녀모양 담백한 얼굴의 목순옥여사(65세)와 마주 앉았다. 원래 귀천은 사계절 모과차가 유명했던 곳이었다.
그날은 모처럼 나온 햇살이 푹푹찌던 날 역시 슬라이스된 모과와 얼음이 들어있던 냉모과차를 내주시는 목순옥 여사님. ....역시 귀천의 메뉴다웠다.
목순옥씨는 생에 이렇게 바쁘게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정말 귀천2 오픈에 천상병시인의 추모10주년 기념행사 건 등으로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고 말한다.
천상병 시인 10주기 추모식으로 지난 4월27일 의정부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시 낭송회 및 추모공연을 가졌고 지난 6월30일에는 예총회관에서 귀천(歸天) 싯귀가 들어간 시비(詩碑) 제막식을 가졌다.
한편 10주기 추모행사 기념식의 하나로 목순옥씨가 갖고 있던 미술소장품 .(약 160여점) 및 유품 전시회( 시계, 펜, 만년필, 면도기 돋보기 등, 작가들의 편지, 육필원고 5점, 도자기 2점등)를 한달 동안 가졌다고 한다.
@ 올해 천상병 시인 10주기 맞아 목순옥여사 미술소장품 및 유품 전시회 열어
그리고 재미동포 문인들이 천상병(사진) 시인의 10주기를 맞아 고인을 기리는 추모제를 지난 6월 20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었는 데 목순옥여사도 거기에 다녀왔다고 말한다.
미동부 한국문인협회(회장 이정강)가 주최하고 뉴욕 한국문화원. 미주한인의학협회. 뉴욕 서울대총동창회 등이 후원하는 이번 추모제에는 목순옥여사를 비롯해 가수 이동원씨, 시인 박정희. 김송자. 권숙자. 김인자씨 등이 참가했다.
뉴욕의 행사에 참석했던 목순옥는 " 행사에서는 고인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었고, 가수 이동원씨가 추모곡을 불렀다" 고 귀뜸하는 한편 "캐나다 토론토 거주 문인들도 6월 22일 '千시인 추모의 밤' 을 가졌다" 말했다.
이외에 천상병문학제가 지난 5월4일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귀천시비’ 앞에서 열렸다. 목순옥씨는 " 지난 20여년 동안 갖고 있던 그림들이 전시기간 중에 팔렸는데 이 금액은 전액 10월말 경에 열릴 '천상병 문학상' 기금으로 쾌척할 예정" 이라고 말했다.
나이답지 않게(?) 소녀같은 순박함을 갖고 있는 목순옥씨, 그도 영락없는 천상시인의 아내였다. 꾸미지 않은 얼굴에서 은은한 묵향이 묻어나듯이 .........
목순옥씨는 수락산근처에서 90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아직 노모가 해주시는 아침밥을 먹고 출근을 한다고 하는 그는 올해 안에 할 일로 의정부에서 한달 동안하고 그친 미술소장품 전시회를 귀천이 있는 인사동 근처 화랑에서 다시 한번 열 계획이라고 했다.
의정부에서 전시를 했을 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인들 보고 멀리까지 와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고 하는 그는 남편의 추모 10주년 기념식을 다시 한번 인사동에서 열어, 와보지 못한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귀천2에는 그동안의 천시인 남긴 시집들이 책꽂이에 꽂혀 있고 잔잔한 웃음을 띤 소국이 한아름씩 항아리에 꽂여 있었다. 그리고 마음까지 정갈하게 씻어줄 것 같은 냉 모과차와 필히 천상병 시인에게서 감염됐을 순수하고 해맑음을 간직한 65세 소녀 목순옥씨가 있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천시인에게 가서 그 역시 " 이 세상이 아름다웠노라" 고 말 할 것이다.
황수진
2003년 09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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