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383) 역경을 뚫고 올라온 KRA 승마단 코치 겸 선수 전재식
마사회하면 십중팔구는 관람석을 가득 메운 수만 인파가 경주로를 질주하는 경주마들을 지켜보면서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함성의 물결로 뒤덮이는 과천서울경마공원을 떠올린다.
경마장에서 경마를 빼면 뭐가 남을까.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닐까. 아니다. 경마장에는 승마가 있다.
사회체육 활성화 차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승마강습을 꾸준히 해오고 있고 또한 엘리트 체육으로 국내외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마사회 ‘막강’ 승마단이 있다. 그리고 마사회 승마단의 코치겸 선수로 뛰는 ‘42살 현역’ 전재식이 있다.
그는 승마선수로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말이 생명인 승마에서 28년을 선수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자기말’을 소유한 적 없이 지금까지 왔다는 자체가 놀랍다. 그것도 국가대표이자 가장 잘나가는 마사회 승마단 코치겸 선수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승마 종합마술팀 국가대표 김형칠 선수가 경기중 사망한 비극적 사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시합에 같이 출전했던 선수가 바로 전재식 선수다.
그 때 그 사건을 계기로 승마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사회 체육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를 만났다.
지하철역 입구를 빠져 나오자 때맞춰 내리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던 날 오후 조경이 아름다운 마사회 과천 서울경마공원 승마교육원에서 그와 마주 앉아 그의 승마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중 2때 저희 학교에서 뽑은 올림픽승마꿈나무 7명 멤버에 우연히 제가 포함됐어요. 그 중에서 집안 환경이 가장 어려웠던 저 혼자만 유일하게 지금까지 말을 타고 있습니다. 승마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인식 때문에 아버지가 결사반대 했지만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못 말리는 고집에 타고난 승부욕으로 고 3때 승마 종합마술 국가대표가 되었으나 정작 아시안 게임과는 인연이 멀었다. 말하자면 사연이 길다.
“대학 1학년 때 86서울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면서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마지막 5차전을 남기고 4차전까지 2등으로 올라온 상황에서 그의 대표 선발은 이변이 없는 한 확정적이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의 압력으로 그가 타는 말이 아프다는 엉뚱한 이유를 만들어 그를 빼고 순위가 밀린 선수를 포함시켰다. 사실은 그가 탄 말이 아프지도 않았는데…
충격을 받은 그는 운동을 그만둘 생각으로 8개월이나 말을 타지 않았다. 의욕을 상실한 그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기분 전환할 겸 며칠 여행이나 하자고 해서 같이 설악산에 놀러갔다.
“여관에서 우연히 TV를 켜니까 86 아시안 게임 속보로 같이 선발전을 치렀던 승마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마음을 바꿨어요. 일단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자고 결심하고 다시 말을 탔죠.”
시련은 계속 이어졌다. 90 베이징 아시안게임은 승마가 정식 종목에서 빠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고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선수들의 보이콧으로 출전을 못했다.
훈련에 몰두하며 학수고대했던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도 그는 나가지 못했다. 장애물에서 4명 선발에 4등을 하고도 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승마대표 최종 명단에서 빠진 것이다.
그때도 그와 함께 훈련했던 선수들이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우승 감격에 환호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당시는 그래도 마음이 한결 편해져 내가 빠진 대신 다른 한 사람에게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위안을 삼았다.
절치부심 끝에 벼르고 벼르던 2006년 대망의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기회를 얻었으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금메달 꿈은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금메달을 기대하던 온 국민을 충격에 빠지게 한 바로 그날 2006년 12월 7일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승마대표팀 김형칠 선수가 종합마술 이틀째 경기에서 낙마사고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951년부터 시작된 아시안 게임에서 경기 도중 선수 사망은 김형칠 선수가 처음이었다.
김형칠 선수와 함께 종합마술 대표팀에 선발된 전재식 선수는 이날 김형칠 선수 다음다음에 뛰기로 했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남은 경기 출전을 모두 포기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아직 아시안게임 메달 도전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처럼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각종 국내대회에서 우승을 도맡아 했지만 아시안 게임 출전기회를 3번이나 놓치니까 이제 오기밖에 안 남았다는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면서 2010년 중국 광조우 아시안게임에 도전하여 미뤘던 금메달을 벼르고 있다.
그는 KRA 소속으로 있는 지금이 선수인생에서 최고의 기회라면서 그동안 역경 없이 순탄한 길을 걸어왔으면 지금처럼 편안하게 말을 탈수 없었을 거라고 의미 있는 말을 한다.
KRA 승마선수단은 박재홍 감독겸 선수를 비롯하여 전재식 코치겸 선수. 그리고 선수 2명등 모두 4명.
“20년 말을 타고 나서야 승마에 조금 눈을 떴다”는 28년 경력의 전재식 코치는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을 보더라도 40~50대가 많다” 면서 승마는 그만큼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국내에서는 그가 속한 마사회 승마단이 단연 최강. 2007년부터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전국 승마대회 단체전 9연패에 대통령배만 4연패 위업을 달성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는 20년 말을 타고 나서야 겨우 눈을 떴으니까 앞으로 20년은 더 선수로 뛸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 있다.
코치 겸 선수로서 그는 마사회에 들어오기 전에도 주로 지방에서 승마교관으로 활동했다면서 항상 해오던 일이니까 1인 2역에 어려움은 없다고 말한다.
그가 꼽는 승마가 좋은 점.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위운동을 많이 하니까 소화가 잘되고 변비가 없어진다면서 허리가 좋아지는 운동임에는 분명하지만 특별히 허리가 안 좋은 사람은 무리가 올수 있으니 말을 타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사회 체육으로서 국내 승마는 어디쯤 와 있을까. 승마하면 특혜 받은 사람만 타는 ‘귀족운동’으로 여기던 예전에 비하면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사회체육으로 확산되기까지는 아직도 시작단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엘리트 승마는 룰에 따라 계통과 체계가 잡혀 있지만 사회체육 승마는 정확한 룰이 세세히 확립 돼 있지 않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생활체육 승마에서도 스타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사회체육으로 승마를 하시는 분들도 품위 있게 좋은 운동 할 수 있는 룰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이 좋아야 스타가 나올 수 있지요. 그러기 위해선 승마용 마필을 국내에서 좀 더 많이 생산해야 합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A급 말은 타보면 항상 믿음직스럽다. 돌려 말해 승용차로 치면 CC가 다르다.
“제가 말을 타면서 지금까지 뭘 배웠나 생각해보니 처음엔 사랑을, 다음엔 체벌을 배웠어요. 그런데 체벌을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20년이 지나서야 퍼뜩 관용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말한테 관용이 생기더라고요. 말이 부족하더라도 베푼다고나 할까요.”
말을 타면서 그렇게 세상과 인생을 배워나간다는 그는 앞으로 뭘 더 배울지 모르겠다면서 말에 대한 무한 사랑과 예찬론을 펼친다.
승마인생으로 살아오면서 자부심도 크지만 애환도 많았다는 그는 그래도 후회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의 모습에서 영화 공공의 적이 떠올랐다. 코흘리개 학창시절 배경 좋고 화려한 집안의 ‘힘’있고 ‘빽’있는 자녀와 반대의 자녀로 만나는 두 주인공이 성장하고 사회인이 돼서 역전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앞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도 따고 선수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올림픽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기자를 배웅하는 길에 입구까지 따라 내려와 아직도 소년 같은 꿈을 간직하고 있다면서 ‘속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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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8월02일 17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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