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1)
희미한 형광등 불빛아래 놓여 있는 모든 것들... 아마도 아들놈의 저녁이었을 먹다 말은 밥 한 덩이와 김치 한 조각이 전부인 밥상이, 제 때 빨아주지 못해 때에 절어 있는 이부자리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진통제 약병이, 그리고 잔뜩 구겨진 채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아이의 숙제장이... 이 모든 것들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아내의 텅 빈 동공과 함께 내 가슴을 자근자근 저며왔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넋을 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들놈이 뒤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조심스럽게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병든 아내를 떠나보낸 못난 남편이고, 한참 자라나는 아들놈에게 치킨 한 조각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비에게 무슨 울 자격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흐르는 눈물은 어찌 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 날은 밤새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내의 얼굴을 보듬으며, 먹다 남은 치킨 조각을 한 손에 꼭 쥔 채 젖은 눈으로 잠들어버린 아들놈의 볼을 부비며, 그렇게 밤새 울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연민에 연민이 쌓여 제 감정을 통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얘기는 이제 그만 하기로 해요.”
저는 당신의 말을 끊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 곡 추고 싶어요.”
당신은 여전히 우울한 눈빛을 한 채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CD 플레이어에서는 STAY IN MY LIFE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춤추기에 적합한 곡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그 슬픈 얘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결코 그 슬픈 얘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won't you stay in my life. forever and always......”
언제까지나 항상 내 안에 머물러 달라고 노래하는 제랄드 졸링의 목소리가 너무도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목소리는 어쩌면 당신의 가슴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발이 엇갈리고 말았지요. 제가 휘청하자 당신은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넣었고, 저는 당신의 가슴에 안겨 들었습니다. 누구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서로를 안고, 안긴 채 계속해서 춤을 추었습니다.
아버지 이외의 남자 가슴에 안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의 가슴은 꽤나 넓고 포근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적에 느꼈던 아버지의 가슴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펼쳐진 것은 메말라버린 대지뿐이란 생각이 들자 제 가슴도 왠지 답답해왔습니다. 그 대지를 적시는 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습니다. 당신의 눈길도 저를 따라 움직였지요.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는 당신의 눈망울은 여전히 우울한 빛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눈가에 남아있던 눈물이 양옆으로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천천히 움직이던 당신의 발이 멈추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등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혹시 제 마음이 열망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살며시 까치발을 떼며 턱을 치켜들었습니다. 당신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지더군요. 제 호흡도 조금은 거칠어졌습니다.
그때 당신의 따스한 손길이 양 볼에 느껴졌습니다. 이어서 두 개의 엄지손가락이 제 눈꺼풀을 가볍게 누르며 눈물을 쓸어나갔습니다.
“울지 말아요, 지영씨.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눈물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으니 말입니다.”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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