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17)
2005/09/07 00:0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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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7

 

본문보다도 더욱 길게 쓰여진 추신은 하루 내내 서운했던 제 감정을 일시에 녹여버리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시장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납작한 종이상자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뚜껑을 열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피자가 먹음직스러운 향기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마른 속에 먹기에 적합한 음식은 아니지만 배달을 보내기에 마땅한 것이 달리 없었소. 꼭꼭 씹어서 천천히 드시오.

작은 쪽지에 쓰여있는 메모는 당신의 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타인을 배려함에 있어 어느 한 구석 빈틈이 없는 바로 그 마음 말입니다. 피자는 오븐에서 갓 구워낸 듯 따끈했고, 배달도중에 어느 정도 굳게 마련인 모자렐라 치즈는 특유의 말랑말랑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던 게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흔히 접하는 체인점 피자에 무슨 특별한 맛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날만큼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조금은 뻣뻣해서 씹기에 부담이 가던 빵조차 부드럽게 녹아드는 것 같았지요.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향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는 그 향기에 취해 피자 한 판을 모두 먹어버렸고요.

다음날 저는 정상적으로 출근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셨는지 몰라도 사내의 모든 사람들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사장님까지도 말입니다. 민망하더군요. 술병이 났던 것뿐인데 큰 병이나 걸린 것처럼 위로들을 해주니...

그 날 밤의 기억 때문에 당신을 대하기가 조금은 민망했지만, 그래도 약속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던 전날보다는 마음이 훨씬 더 편했습니다. 언제든지 원하면 볼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마음이 무의식중에 행동으로 나타난 것일까요? 저는 그날 따라 유독 당신과 많이 마주쳤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마음좋은 미소로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고요. 그렇게 한 나절이 지나고 퇴근시간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제 근무처로 당신이 찾아 오셨습니다.

"같이 저녁 하지 않겠소?"

저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주변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지요.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끼리 저녁 한 끼 먹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일이었지만, 당신과 있었던 일이 머리에 가득한 저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때 당신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저 아래로 조금만 가면 해장국을 아주 잘 끓이는 집이 있는데... 괜찮겠소?"

"해...장국이요?"

당신에게 벌써 두 번이나 만취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저는 괜히 제 발이 저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당황해 하는 제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당신은 짓궂은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대로 있다가는 무슨 말이 또 나올지 몰라 저는 부리나케 책상을 정리하고 당신을 따라나섰습니다.

당신 말씀대로 그 집 해장국은 정말 맛이 있었습니다. 매콤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일품이었고, 커다란 그릇에 그득하게 담아 나오는 넉넉한 인정이 훈훈했습니다. 타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정이 느껴지는 곳이었지요.

그런 분위기에 취한 탓일까요? 저희는 언제 시켰는지도 모르게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지요. 당신과 함께 있기만 하면 술을 마시게 되니 말입니다.

어쨌든 그 날도 꽤 많은 술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당신 팔에 매달려 밤거리를 한없이 걸어 다녔지요.

특별한 주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만큼 서로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10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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