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22
부인을 보내고 난 뒤의 심경이 담긴 당신의 글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일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뽑아들고 말았습니다.
남의 일기를 본다는 것은 분명 몰염치한 행위입니다만 저는 그것을 보고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으면서도 제 손은 어느새 일기장을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첫 장은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고 하루가 지났소. 하지만 이 비닐 하우스 안엔 여전히 우리 셋 뿐이오. 당신은 누워 있고, 나는 앉아 있고... 재민이는 옆에서 잠이 들었소. 잠시 후면 우리 둘만 남게 되겠지. 어제 사온 케익도 다 떨어져서 이젠 먹일 것이 없소. 그래서 재민이는 제 고모 집으로 보낼까 하오.>
그 밑으로도 두어 줄 정도 더 있었던 것 같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생각나는 것들도 일부는 틀렸는지 모를 일이지요. 저는 계속해서 당신의 일기를 읽어 나갔습니다. 아니, 일기보다는 편지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미 떠나버린, 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말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신 몸 위로 흙이 끼얹어 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소. 재민이가 섧게 울더군. 이제는 정말로 엄마를 볼 수 없게 됐다며 말이오. 내 여동생 민진이도 많이 울었소. 제일 힘들 때 병이 들어 치료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간 올케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그치지 못하더군. 고향에 있는 선산이어서 동네 분들도 많이 왔었소. 고마운 분들이지. 그런데 누가 왔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소. 겨우 몇 시간 전의 일인데...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소. 이제 조금 있으면 땅거미가 드리우겠지. 나는 그때나 실컷 울려고 눈물을 아껴두었소. 매제가 그러더군. 자기 집으로 함께 가자고 말이오.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저었소. 그 집도 힘든 모양이던데, 재민이를 맡기는 것도 모자라 나까지 신세를 지면 너무 염치가 없지 않소? 그래서 나는 고향에서 며칠 신세를 지고 올라갈 테니 먼저들 가라고 일렀소. 그 뒤로도 몇 번 더 권유를 했지만 내가 계속 고개를 저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가더군.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산을 내려가고 이제는 나 혼자 남게 되었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손님치레를 하려고 준비해 온 소주가 반 박스 정도 남았는데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오. 이제 술은 실컷 먹을 수 있게 됐으니 정말 다행 아니오? 어떻소? 덮고 있는 이불이 좀 두껍기는 하지만 툭툭 털고 잠시 나오지 않겠소? 이제는 석양도 완전히 저물고 잠시 후면 달이 뜰 테니 둘이 오붓하게 한 잔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소?
......
혼자 마신 술이 벌써 세 병째요. 그런데도 당신은 나오지 않는구려. 당신 없이 혼자 마시니 술이 좀처럼 취하지 않소. 그래도 비닐 하우스에 있을 땐 당신 손이라도 잡고 마실 수 있었는데... 이제는 차갑게 식은 그 손마저 주기 싫은 모양이구려.
하긴 이 못난 놈을 다시 보고 싶을 리 없겠지... 하지만... 나는 보고싶구려. 당신 모습이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소. 그럴수만 있다면 당신을 내리 누르고 있는 저 두터운 흙무더기를 당장 치워버리고 차가운 시신이나마 다시 한 번 보았으면 좋겠소.>
아마 이 편지가 네 번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은 눈물이 심하게 얼룩져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슬펐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요. 금방이라도 등뒤에서 포옹해 올 것만 같은데, 막상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그 공허함... 저는 겪어보지 않아 실감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야기로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당신의 편지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앞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눈물이 심하게 얼룩져 있었고, 술이 많이 취해서 쓴 듯 글씨가 심하게 흘려있어 읽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대여섯 장을 넘기고 나서였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 11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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