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459) 오페라가수로 가장 전성기 때 삶이 확 바뀐 유성은 오페라가수로 잘 나갔다. 하지만 가장 전성기 때 세계적인 성악가 꿈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명예와 물질에 대한 욕심도 깨끗히 비웠다.
순복음 영산신학원 찬양목회학과 유성은 학과장. 나이 40을 축으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전부였던 오페라가수를 포기하고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며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면서 행복은 물질과 부와 명예가 아니라 마음먹기 달렸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체험했다.
툭하면 입에서 돈돈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요즘 사람들에게 그가 살아가는 삶은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한 순간에 평생을 살아온 삶의 축이 완전히 바뀌다니 그를 변화시킨 결정타가 뭔지 인터뷰 기자 본능의 호기심을 가득 품고 지하철 서울 광흥창역 4번 출구 인접 순복음 영산신학원 찬양목회학과 학과장실에서 유성은 학과장을 만났다.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를 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식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그의 결정적 계기는 신앙이었다.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기도를 먹고 자랐다. 아버지는 시골 교회로만 돌며 목회자로 47년을 봉직하고 70세 때 은퇴하셨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어요. 부모님 체면이 있어서 집에서는 함부로 못하고 밖에 나가면 굉장히 프리하게 살았어요”
어려서부터 중창단 리더가 되면서 음악을 접했고,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 설득해서 클래식을 전공,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아내와 함께 이태리로 유학 갔어요. 와이프(정현진)와는 경기고, 경기여고로 인연을 맺어 서울대 음대 성학과를 거쳐 이탈리아 로시니 국립음악원에서 같이 공부했어요. 고등학교, 대학, 국립음악원까지 졸업은 제가 아내보다 한 해 빨랐죠.”
그는 이태리 국립음악원에서 성악 개인스승을 잘 만났다. 이탈리아 스칼라극장에
서 오프닝 공연을 세 번이나 할 정도로 세계적인 가수였다.
“7년 이태리 유학 기간 중 3년쯤 지난 시점에서 그 분을 만났어요. 공교롭게도 그분 사모님한테는 제 와이프가 성악을 배웠어요. 저는 바리톤 오페라 주역가수 훈련을 받았어요. 실력도 인정받고 음악활동도 하고 나름대로 잘 나갔죠.”
유학당시 한국에 IMF가 터지는 바람에 환율이 두 배로 뛰었다. 혼자 유학생활 하는 정도의 비용으로 아들까지 세 명이 썼으니 궁핍해서 밥을 못 먹을 정도였다. 그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친형님 같은 집주인이 나를 케어하고 많은 도움을 줬죠. 성경을 보면 고아, 과부, 이방인을 도우라는 말이 있잖아요, 집 주인이 저보다 20살 연상인데도 저를 이방인으로 알고 친구처럼 대해줬어요. 덕분에 문화, 언어, 삶, 신앙적으로 많은 걸 배웠어요.”
이태리 유학 마치고 한국 와서 오페라가수로 활동하다가 다시 미국에 갔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은 다시 못 돌아올 줄 알았다.
“미국에서 늘 꿈을 꿨어요. 이태리 스승이 ‘넌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것’이라는 꿈을 심어줬거든요. 그 말 믿고 미국에서 계속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40살이 되면 세계적 성악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LA 한인사회에서 라디오 방송 진행자로, 오페라 가수로,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이 바뀌는 변화가 왔다.
“LA 순복음 교회로부터 우연히 성가대 지휘자로 콜을 받았어요. 그 성가대가 3개월을 공석 상태에서 저를 초빙하려고 기다렸어요. 그 때만 해도 별로 안 내켰지만 갔어요.”
거기서 신앙을 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 가서 마지막 오페라 가수로 크게 세계적으로 놀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40살이면 그 꿈을 이룰 거라고 믿었어요. 그게 2006년 초예요. 그래서 슬슬 알아보던 중에 이영훈 LA 순복음 담임목사님을 알았어요. 현재 여의도 순복음 교회 담임목사님입니다.”
당시 LA 100주년 아주사 성회를 앞두고 연합성가대에서 지휘를 해보라는 오더를 받았다.
“조용기 목사님이 주 강사로 오기로 돼있으니 거기서 연합성가대 지휘를 맡아달라는 거예요. 나는 이미 유럽행을 계획한 상태에서 그거까지는 해놓고 유럽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죠.”
연합성가대 지휘를 맡아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설교를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났다. 형님이 보내준 설교 테이프를 듣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2006년 4월말 한인 목회자 세미나 식으로 열리는 북미 총회 집회에서 첫 번째 지휘를 맡았을 때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처음 들었어요. 그날 삶의 성령을 받고 스파크가 팍 터진 거죠. 제 삶이 그날 저녁부터 확 바뀌었어요. 하나님한테 완전히 사로잡힌 거죠.”
그 이후로 모든 삶의 목적이 하나님밖에 없었다. 밤마다 조용히 산책을 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느낌이 왔다. 그때 결정적인 3가지를 내려놓았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물질을 초연한 삶을 살겠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은 돈하고 상관없이 무조건 하겠다고 작정했어요.”
둘째는 명예를 내려놨다. 물질과 명예를 다 내려놓고 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견하시겠지’ 생각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떤 말씀으로 내 마음의 울림처럼 음성이 들리는데 음악을 내려놓을 수 있겠냐고 하네요. 음악은 저의 전부였거든요. 하나님이 저의 결정타를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래도 예스라고 했죠. 그래서 주님의 찬양 노래 외에는 세상 노래를 안 하겠다고 했어요.”
세상에서 하는 마지막 음악회를 앞둔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2006년 8월 월트 디즈니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LA 한인의 날 제정 기념 음악회였다.
오페라가수로 세상에서 하는 그의 마지막 음악회를 취재하러 기자들이 왔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를 전도하려고 설득했다.
“‘나는 더 이상 오페라 가수 안하고 주님 찬양하기 위해서 간다. 행복하다. 너도 예수 믿어라’ 했어요. 그것이 그대로 신문에 났어요. ‘성악가 유성은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다. 하나님 찬양 외에는 더 이상 오페라가수 안 한다’고 대서특필한 거예요.”
그 삶이 2006년 말로 LA 생활 접고 한국에 온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들 셋과 부인은 LA에 놔두고 대책도 없이 한국의 신학생으로 2007년 그 혼자 덜렁 왔다. 교수도 아니고 목회자 되기 위해서 한세대 신학원 MDB과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LA에 있는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더라고요. 여기 저기 제 찬양 듣기 원하는 곳에서 찬양도 해주고, 복음 성가집을 만들었어요.”
그는 지금 순복음 영산 신학원 찬양목회학과 학과장으로 있다. 쉽게 말해서 목사, 전도사 양성하는 학과다.
“전에 기독교방송(CBS) ‘새롭게 하소서’ 프로에 나와 달라는 요청을 줄기차게 받았지만 그 때마다 항상 거절했어요. 그런데 오늘 웬일인지 이렇게 피플코리아 김명수 기자님과 인터뷰를 하고 있네요.”
‘내가 왜 이 자리까지 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기자도 그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는 음악가가 꿈이 아니고 찬양을 하는 설교자가 꿈이다. 찬양하면서 설교하기를 원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웅변을 시켰거든요. LA에서도 방송, 음악, 오페라 가수를 했고요. 그 경험을 살려 오페라 가수와 강단에 있는 설교자와 크로스 오버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예는 없었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성악가로서 가장 좋은 소리가 나고 가장 전성기 때 오페라 가수를 내려놓은 그는 노래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모든 달란트를 하나님한테 온전히 바치는 삶을 원한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평생 목회하시면서 저를 위해 기도했는데 돈이 없어도 전혀 어렵다는 생각이 안 들고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고 좋았어요. 이태리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화를 했어요.”
지금 그는 12월에 공연할 뮤지컬 ‘꿈꾸는 사람’ 준비로 바쁘다. 순복음 영산신학원 찬양목회학과에서 주관하는 뮤지컬로 그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오라토리오형 뮤지컬’로 규모가 큽니다. 교회뮤지컬 중에서 창작으로 해보는 새로운 시도죠. 12월16~18일 여의도 순복음교회 바울성전에서 공연할 예정입니다.”
하루 일과를 물으니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신학원 강의하랴, 뮤지컬 준비하랴, 학교 성가대에, 여의도 순복음교회 5부성가대 지휘자까지 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 부족하다.
“아들이 목욕탕을 같이 가고 싶어 해요. 한 달에 두 번 정도 아이들과 같이 목욕탕 가고 놀아줘요. 아들만 셋입니다. 제가 한국에 오고 2년 후에 가족이 들어왔어요.”
자녀 교육을 위해서 부모가 기러기 아빠가 되고 서로 떨어져 지내는 걸 이해 못한다는 그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같이 가려고 한다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털어놓는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고 모든 것이 감사하죠. 쓸 데 없는 욕심이나 허세를 부린다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지금까지 순리적으로 왔고 감사한 게 너무 많아요.”
그에게도 궁극적인 꿈은 있다. 자신이 일을 만들어서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를 필요로 하는 방향에서 크게 써주기를 꿈꾼다.
“인간은 다 똑같죠. 다만 저는 제가 죄인임을 더 많이 고백하고 회개할 뿐입니다. 남들이 보면 능동적인 삶이라고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수동적인 삶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거에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행복을 집착하지 않을 때 행복해 지더라는 그는 너무 붕 떠있지 않고 현실에서 균형감 있는 삶으로 하나님이 주는 꿈과 함께하기를 원한다.
인터뷰는 영산신학원 ‘찬양목회학과’ 학과장실에서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졌다. 그가 김준재즈가수와 함께 낸 찬양음반의 편곡자가 공교롭게도 기자와 이름이 같은 김명수였다.
기자가 그를 인터뷰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었다.
* 이 기사는 피플코리아의 허락 없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피플코리아에 실리는 모든 기사의 저작권은 오직 피플코리아에 있습니다.
<피플코리아/ 김명수기자
www.peoplekorea.co.kr>
2010년 10월21일 17시51분.
피플코리아 홈으로 바로가기 ☞ 클릭이사람 명단 346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