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5.04.09.20:22 |
[클릭이사람] (461) 성 4번, 이름 5번 바뀐 북파공작원출신 마이클리 ‘내 과거를 돌려주세요’ (2)

북파공작원 출신 마이클리는 1972, 76년(유신헌법) 사건으로 38년 동안 억울한 지명수배자로 몰려 40여개국 도망다니고 주민등록 22년간 직권 말소된 현대판 빠삐용이었다.
 
관련기사 클릭이사람 428번 성 4번 이름 5번 바뀐 북파공작원출신 마이클리 내 과거를 돌려주세요 (1) 

▲     ©김명수기자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 38선 북방․남방한계선 DMZ에서 그의 인생은 처참하게 꼬였다. 

국가유공상이군경 및 1급중증장애인. 전(前) 북파공작특수임무첩보수행자 마이클리. 38년 동안 도망자 아닌 도망자로 40여개국 나라를 방랑자, 집시로 생활하면서 온갖 험한 꼴을 다 경험한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가장 명이긴놈,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놈. 기가 쎈놈. 비참한 놈. 운좋은 놈. 불쌍한 놈. 행복한 놈. 가련한 놈’이라고 말문을 열였다.  

그는 한국에서 유령인간이었다. 국익을 위한다는 ‘허울’좋은 명분을 내세워 북파공작원으로 끌어간 국가가 그렇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고 두뇌회전이 빨라 첩보원으로 활용가치가 높은 그를 국가는 가만 놔두지 않았다.

국가가 그의 이름과 성(姓), 출생지, 주소를 쥐도 새도 모르게 몇 번씩이나 바꾸고 나이도 고무줄 늘이듯 바꿨다.

인권 침해에 권익침탈에 권리까지 박탈당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한국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외국에 나가 망명신청을 했으나 그마저 불가능했다.

국가가 그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워 38년이 넘도록 기소중지자로 묶어놓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령인간 신세가 되었다.

[ 클릭이사람 428번 성 4번, 이름 5번 바뀐 북파공작원출신 마이클리 ‘내 과거를 돌려주세요’(1) ] 제목으로 2009년 09월24일 인터뷰신문 피플코리아(www.peoplekorea.co.kr)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이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북파공작원 출신 아버지에 북파공작원 아들. 그는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2대에 걸친 북파공작원 출신이다. 한국전쟁 고아로 한국을 구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교 조종사의 양자로 들어갔다. 

▲ 북파공작원 마이클리의 침실 현관문 잠금장치. 그는 원래의 도어록 외에도 5개의 잠금장치를 모두 걸어놓고 양품에 호신용 단도를 품고 잠을 잔다     ©김명수기자
그러나 비행 훈련 중에 발생한 사고로 양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생부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북파공작원. 양아버지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교 조종사로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하고 한국에서 비행훈련중 사망… 

그리고 그 아들인 당사자 마이클리도 국가를 위해 목숨 걸었다가 만신창이가 된 북파공작원. 그는 애국자 집안으로 국가에서 영웅훈장을 주렁주렁 걸어줘도 모자랄 판에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한스럽다며 땅을 친다.

그는 지금 국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1968년 북파공작원 첩보수행자로 끌려간 이후 엉망진창으로 꼬인 인생을 제자리로 돌려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행정재판, 호적재판, 검찰청, 헌법소원, 재심청구, 파산선고신청 등 사건번호가 다른 7개 재판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모두 국선변호인이 변론을 맡고 있으면서도 재판부서와 판사가 다 틀리다.

사건 개념으로 보면 7건의 재판이 북파공작원으로 야기된 단일 사건이다. 한 사람이 국가 상대 단일 사건 개념으로 7건의 재판을 동시에 진행한 경우는 단군 이래 한국 역사상 그가 처음이다.

1996년 3월 법정투쟁을 시작하여 2010년 11월 현재 15년째 계란으로 바위치기식 국가와의 힘겨운 싸움을 해오고 있는 과정이 눈물겹다.

1996년 3월 국가유공상이군경 신청을 하여 2003년 3월24일 7년만에 가결 인정받았다.

1986년 9월1일 치안본부장에 진정서를 올릴 당시 이름은 이형기였다.

한국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왜, 왜, 왜 군사정권시절 중앙정보부에 충성했어 미 CIA 정보국 또한 충성했지만 나 몰라라 하고 천신만고 끝에 암살문턱에서 살아남았건만 박정권 무너지고 안기부는 외면하고 문민정부 들어서면 나 돌로 맞아죽어 나 역시 고아로 자란 것이 한이 서린데 딸까지 애비없는 고아로 만들 수 없기에 전 중앙정보부 안기부, 미 CIA 정보국 이쪽저쪽 눈치 보면서 이대로 가다간 이중첩자로 오해받아 어느 곳 누구에 의해서 죽을 수 있어 이대로 죽긴 너무 억울해서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1986년 치안본부장에게 올린 진정서 내용(아래)이 가슴을 적신다.


본인의 과거전과 사실까지 친근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범법자인양 생에 막대한 불안감과 명예를 먹칠 조성하여 얼굴도 들지 못하는 현(現)사태까지 왔으며 1급중증장애인으로써 생명에 불안을 느끼며 그 누구의 감시속에서 건강은 더욱더 악화일로에 있으며 지휘 상하를 막론하고 합법적이고 법적인 절차없이 본인의 신상에 대해서 조사밀탐하는 자를 단호히 조사해주셨으면 생에 불안을 감수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진정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1986년 9월1일. 진정인 이형기 올림.


1986년 완벽하게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 억울한 전과관계 (72년, 76년, 77년 건) 전과기록 폐기확인서를 이미 10년 전인 1977년 11월 3일에 서울지방검찰청 (당시 검사 이경신) 기록관리과에서 받아놨다. (72, 76년 유신헌법) 군사정권 정치적 프락치 사건은 무덤속까지 가져가야할 약속과 배신 그러나 X-파일 의리의 신념은 변함이 없다.

▲ 그의 방 세 칸중 두 칸이 그가 모은 각종 자료로 가득 차있다. 그가 15년간 국가를 상대로 법정싸움을 해오면서 수집한 자료를 모두 합치면 1만장이 넘는다.     © 김명수기자
1977년에 과거의 모든 전과기록을 폐기하여 깨끗이 신원을 회복하고 해외에서 사업및 망명신청을 하더라도 일체 하자 없다는 신원증명서까지 떼어가지고 10년 후인 1986년 미국에 건너갔다.  

뉴욕 맨하탄 소재 유엔총회에 입성 국제인권위원회 소속 인권 판무관 책임자를 만나 대한민국 역대대통령(박정희, 전두환), 전 중앙정보부장(김형욱, 이후락) 국방부장관 및 군 장성 수뇌부, 정치수뇌부 등등 도합 12명을 인권침해 권익침탈 권리박탈 혐의로 고소, 고발 진정 탄원을 직접 접수하였다.

미국 정보국에 갔더니 한미군(軍)정보작전협약이 되어있지 않은 유럽이나 남미 및 남양(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하면 도와주겠다는 협조를 얻어냈다.

그래서 호주로 건너가 이민국 고위 관리를 만났다. 이민신청을 했으나 38년 전(1972년), 34년 전 (1976년) 두 사건 기소중지 관계로 이민신청을 거부당했다.

신원조회 과정에서 호주 이민국이 한국에 신원조회 신청을 하자 한국에서 지명수배자니까 한국으로 보내라고 호주담당부서에 연락을 취했으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에 맞서서 호주 이민국과 7년 동안 법정싸움을 했다. 

국가 특수임무 수행을 위한 공작원 위장신분으로 가짜신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前) 중앙정보부에서 이중삼중으로 이름을 조작했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에 신원확인을 정식으로 요청했는데 이름을 이중삼중으로 쓰고 지명수배자로 왔으니 현지국에서는 범죄인이라면서 당신 말만 믿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진 해외재산(부동산, 사업권, 특허권, 증권, 금광채굴권, 금융채권) 그 모든 것 몽땅 압류되어 다 날리고 결국은 추방명령을 받았다. 추방명령을 받기 전에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교도소로 수감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인 그의 신변을 보호해 줘야 마땅한 대한민국이 오히려 그의 신원확인을 외면하는 바람에 호주 현지에서 국제 테러범으로 몰려 사살명령까지 떨어져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차 9대가 뜨는 소동까지 벌어졌으니 통탄할 일이다. 사실은 대한민국에서 지어준 이름인데… 억울했다.

‘당신의 안타까운 사정은 인정하나 한국에서 해명자료가 안 왔기 때문에 현지법에 의해서 범법자로 이민신청을 기각한다.’니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 생후 1살때 딸을 데리고 찍은 사진. 그는 1살짜리 어린 딸을 장모님께 맡기고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 김명수기자
한국으로 추방당하면 죽는다는 걸 알고 호주 이민국에서 그럼 일단 호주를 떠나라고 했다. 전 재산이 압류됐기 때문에 돈이 없었다. 비행기 값도 없었다. 영사관에 죽어도 한국 가겠다고 지원을 요청했다. 죽을 각오하고 1993년 한국에 들어왔다.

공항에 도착하니까 벌써 국가정보부 정보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랙에서 내려 입국장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정보부에서 그를 호텔로 데려갔다. 그래서 그가 말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추방당했는데 왜 내가 지명수배자냐? 8년전 그때 당시 정보부에서 외국나가서 X-파일 입다물고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히 살아라 특수여권 만들어줄때는 언제고 이중 삼중 이름도 국가에서 마음대로 쓴 이름인데 아무 죄 없는 나를 왜 범죄인 취급하냐? 내가 진정 지명 수배자라면 감옥이나 검찰 조사실로 데려가야 하지 않냐?”

그러자 그를 일류호텔로 데려간 정보원이 ‘여기서 조용히 있다가 다시 외국으로 나가라. 때가 되면 협조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돈까지 건네줬다.

그가 돈을 호텔 바닥에 집어던지고 “내가 거지냐? 날 풀어 달라.”고 말했다.
이미 예약이 돼서 비용을 지불했다는 말에 그는 한 시간도 있기 싫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구로구 소재지 고시원으로 갔다.  

내 주머니에는 고작 3 만원이 전 재산이었고 그래도 내 조국이었기에 억지로 위안을 찾으며 인간의 한계점을 벗어난 생과사의 갈림길 투쟁과 항거를 또다시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국방부, 보훈처, 인권언론위원회, 재야단체 인권분야, 법조계, 여야를 망라하고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30여 군데에 진정 ․탄원서를 냈다. 그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재야단체와 정치인이 조언을 해줬다.

“이름 이중삼중 바꾸고 억울하게 추방당한 사실을 당신이 지금 입을 잘못 벌리면 정보부에서 죽이던, 국가고위층이나 정보부에서 당신 살려주지 않아. 그러니까 우선 국가 유공자부터 신청해라. 총 맞고 병신 됐으니까 국가 유공자가 되면 국가에서 함부로 당신 죽이지 못해.”

그래서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유공자 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우선 보건복지부에 기초수급자 및 장애인 등록신청결과 ‘양하지마비1급’‘양상지마비4급’ ‘머리장애 3급’ 그 모든 것 일괄적으로 인정통과되었다.

1996년부터 국가 유공자자격심사 신청하여 침묵무장관철사수(목숨으로 침묵으로 사수하라는 내용)라는 미명아래 2002년 북파공작원 광화문 가스통시위 사건 이후에 그의 사건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 호주에서 망명신청하려고 한국에 신원확인과정에서 국가정보부 신원회신 불능으로 호주에서 강제추방당하기 전에 교도소에 수감당한 마이클리의 명찰을 들고있는 사진과 명찰(아래). 호주 교도소 영내에서는 명찰을 차고 다녀야 했다.     © 김명수기자
그의 입을 우선 틀어막기 위한 방패로 2003년 3월 24일 특수임무자로서는 선착순으로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7급 최하위. 월 30여 만 원으로 살아라 38선 DMZ에서 총맞은것 1급 인정하면 지난 세월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권익침탈, 권리박탈을 인정한 꼴이 되니 (43년전 1968년11월)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기 위한 임시땜방질이 아닌가. 하지만 처음부터 국가유공자 포기신청을 냈다.

“난 국가 유공자 안한다. 내 명예 찾겠다. 이름 이중삼중으로 하고, 성도 멋대로 바꾸고, 출생지도 멋대로 바꿔놨으니 모두 제자리로 돌려달라. 그거 하기 전에는 나 국가 유공자 필요없다.”

죄도 없는 사람을 지명수배자로 누명 씌워서 38년 이상 도망자로 만든 과거 원 위치로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처갓집이 죄도 없이 그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혼해서 따로 살 수밖에 없도록 국가가 만들었다.

그리고 한 살 때 딸 얼굴 딱 한 번 보고 외국으로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그 딸이 지금 30살이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얼굴도 모르고 살고 있다. 
 
국가기록에 올라있는 마이클리의 신상정보가 완전 엉터리이다 보니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친 딸의 호적 또한 제대로 기록될 리가 없다. 그래서 한 살 때 헤어진 이후 지금까지 얼굴도 못 본 딸의 주민번호를 2005년에 새로 부여 받았으며 본인호적에 올라있는 딸 엄마이름 또한 엉뚱한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국방부 국무총리실, 보훈처, 서울시에서는 조용히 입 다물고 살라면서 혼자 사는 그에게 경찰서 담장 낀 위치에 35평짜리 아파트 계약을 해줬다. 그가 거부했다.

“내가 왜 감시 요시찰 받고 여기 사느냐? 나 필요 없다. 그리고 혼자 사는 마당에 왜 국민세금으로 35평을 살면서 낭비하느냐? 나는 20평이면 족하다.”

그래서 2003년부터(이명박 서울시장시절) 이 성 구로부구청장(현재 구로구청장 역임)및 조병남 구로구청복지과장(현재 행정국장 역임)의 특별배려한 그 은혜는 평생 잊을수 없도록 눈물이 난다. 보건복지가족법에 의거 국가에 충성한 특수임무목숨담보 공로를 인정 서울시복지예산집행하여 무상전세자금입주자로 그냥 공짜로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서울시 구로구 구로경찰서 담장 100미터 인접 정부주택 다세대 20평에 살고 있는 그는 가슴아픈 사연을 털어놓았다.

장모님께 그가 한국에서 살 수 없으니 외국에서 시민권 딴 다음에 가족을 외국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때(1982년) 장모님이 딸 출생 때 끊은 탯줄을 줬다.

“장모님께서 ‘이거를 자네가 방수처리해서 먼 훗날 딸을 만나면 DNA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수처리해서 보유하고 있는 딸의 탯줄과 43년전 비무장지대에서 특수임무수행당시 추락하면서 빠진 두 개의 치아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장모님이 제 딸을 키웠습니다. 제 딸은 아버지가 자기를 버린 걸로 알고 있겠죠. 장모님이 저 때문에 홧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그가 소송을 제기한 7건의 재판 중에 11월 6일 현재 헌법재판소 헌법소원(전과기록말소거부취소) 재기신청에서 두 건이 해결되었다. 전(前) 중앙정보부에서 전술잔략상 올린 38년전(72년), 76년 두 번에 걸쳐 지명수배자(기소중지) 위장수배를 2010년 11월 4일 검사 김훈영은 사건번호 2010년 형제113612호 불기소 처분에 의한 공소권 없음으로 인한 지명수배는 해당 없음, 해당 없음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 국가가 멋대로 1968년 손씨에서 임씨로 다시 이씨 이형기로 바꿔 사용하던 이름을 1972년 이현기로 다시 바꾸고 지명수배자로 만들어 38년이나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살아온 마이클리. 이것이 바로 1972년 10월5일자로 기소중지된 사건(위장된 조작사건)이다. 2010년 11월4일부로 대한민국 경찰청 및 서울중앙검찰청 검사지휘하에 기소중지가 해제됐고 모든 것이 허위조작사건으로 밝혀졌다.     © 김명수기자
지명수배가 풀리기까지 그가 쏟은 노력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2009년 9월 국민권익위원회 건물 앞에서 1인시위할 때 이재오위원장을 직접 만나서 이명박대통령에게 올리는 탄원서 내용을 보여주고 잃어버린 명예를 찾아달라고 했다면서 당시를 회고한다.

경찰청 주선으로 아침 06시40분 자전거로 출근하는 이재오 워원장을 경찰청 및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담당 경찰들의 입회하에 만나서 “나는 북파공작원 희생자다. 잃어버린 명예를 꼭 찾아달라”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와 증거자료를 직접 넘겨주었다. 그 이후로 그의 명예회복을 찾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조작의 극치는 1972년 지명수배사건이다. 그 전에 사용하던 이름 이형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현기)으로 슬그머니 둔갑시켜 아무죄도 없는 사람을 38년간이나 지명수배자로 만들어놨다. 있지도 않은 유령인물, 유령 사건으로 만들어 그에게 올가미를 씌웠으니 소가 웃을 일이다.

그가 72년 76년 지명수배사건의 억울한 누명은 결국 38년만에 2010년 11월 4일 완전히 풀렸다.
사실은 2010년 11월4일 검찰청 종합민원실에서 43년전 1968년11월 38선 넘어 김일성타도하기 위한 국가에 충성한 자를 38년동안 죄없이 지명수배한 사실을 김정일이 알면 천안함 공격사건은 정당하고 합법적 구실을 주는 꼴이 되고 콧방구로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한달동안 검사를 만나려고 전화를 40번 이상 하고, 민원실에 직접 10번 이상 찾아갔지만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및 김훈영 검사를 직무유기로 고소고발장을 접수하려고 하니까 민원 담당관(배미옥) 얘기가 당신이 검사를 만나면 격한 싸움이 날 것 같으니 결국 민원담당관이 직접 검사(김훈영)를 만나 중재역할을 하여 결실을 보았고 그날이 바로 38년만에 지명수배 해제된 날이다. 그러니 그에게 2010년 11월4일은 실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그는 72년 76년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마지막 결과 (무혐의, 공소권없음)처분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이건 명령이야"라는 어조를 쓸 정도로 그의 강력한 어필에 검찰행정 업무가 마비되고 검사와 격한 말다툼까지 벌였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억울한 게 많다보니 기자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도 많았다.

“72년 내가 기소중지 및 진짜 지명수배자 신분이었다면 74년 수원 교도소 수감당시 수형자번호(1823번) 이미 사건 기록을 마무리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면서 38년을 억울하게 지명 수배자로 살아온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분함을 삭이지 못한다.

이뿐 아니다. 74년 수원교도소(현재 여주교도소) 수감 당시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현주소도 없고 형 확정일도 없고 나이도 또 틀리다. 모든게 엉터리로 어느 게 진짜이고 가짜인지 확인할수가 없다보니 여주교도소 수감당시 인적사항에 이름만 덜렁 올라있다. 그러나 본인의 손지문 만큼은 그 때 당시 역사의 진실을 왜곡할수 없기에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또 있단 말인가. 그의 억울한 과거를 모두 털어놓자면 몇날 며칠을 꼬박 해도 모자란다.

지명수배가 풀렸으니 다음재판은 훨씬 수월해졌다. 호적정정은 72년, 76년 기소중지 불기소 처분결과를 증거로 호적재판 판사가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그렇게 2건이 해결되고서도 앞으로 5건이 재판심리중이다. 모두 억울하게 걸린 재판이다. 
 
그는 재판결과가 중요한게 아니라 역사 앞에 진실을 양심선언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 손자들 후손 만대에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재판심리중 판사 앞에서 그가 말했다.

오늘날에 찬란․무궁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본인과 같은 희생물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내가 그 자리에 그 운명속에 안 들어가더라도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의 한사람은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난 어느 그 누구도 역사앞에 고위 수뇌부 상하를 막론하고 원망을 하고 싶지만 먼 훗날 내 보상은 접어두고라도 억울하게 내 가족, 딸, 처갓집이 당한 불이익은 보상을 해줘라. 이것이 역사의 자존심이다. 이것을 법정에서 ‘나 몰라’ 하면 대한민국 역사의 치욕이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 손자들 후손 만대에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2차 인터뷰는 그가 사는 집에서 진행되었다. 이명박 서울시장 재직 때 보좌관 및 복지담당자가 절차에 의해서 예산지원으로 마련한 한국토지주택공사와의 임차인 계약자는 서울시와 구로구청장 이름으로 되어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주공과 아무 계약이 없이 무계약자로 살고 있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한국토지주택공사와도 일체 전화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2003년부터 지금까지 8년동안 무상정부주택에서 살고 있다.

권익을 찾기 위하여 청와대, 국민권익위원회, 국방부, 국가기록원, 보건복지가족부, 보훈처 시위를 15년동안 하고 재판하니까 국가고위층에서 말했다.

제발 시위하지 말고 법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하면 모든 관계 기관들은 법의 판결을 존중하겠고 다 빠지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본인의사의 법재판 청구가 아니라 국가 고위층에서 재판하게끔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서 그 7건 재판이 동시에 진행중이다. 광복 60년 역사이래 동시에 7건을 국가에서 소송비를 부담해서 하는 사례는 그가 처음이다.

그가 사는 집은 온통 자신의 잃어버린 명예를 찾기 위한 자료로 꽉찼다. 방 2칸을 점령하고 있는 자료만 해도 A4용지 수만장은 족히 넘어 보인다.

3층 꼭대기 구석에 그가 사는 집이 있다. 계단이 가파르다. 그의 침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원래 설치되어있는 ‘도어락’ 외에도 5개의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도 그는 잠잘 때 품에 두 개의 호신용 단검을 품고 잔다.

세계 경제를 이끄는 G20 정상회의 개최를 며칠 앞둔 G20 정상회의 의장국 대한민국의 또 다른 현실이다.

국가는 언제까지 그를 유령인간으로 살게 할 작정인가? 유령인간으로 살아 온 그의 잃어버린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는 그날까지 기자는 국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의 재판 결과를 앞으로도 계속 지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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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코리아/ 김명수기자 www.peoplekorea.co.kr>

2010년 11월07일 12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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