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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1)
2005/04/24 00:00
입력 조회수 : 676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1)
눈 안으로 빨려들 듯 당신이 제게 다가온 것은 유난히도 맑았던 3월 초순의 어느 날인 것 같습니다. 아직 찬바람이 조금 남아 있다고는 해도 당신은 너무 두터운 복장을 하고 있었지요. 모직바지에 롱코트, 목도리까지 두르고... 수염은 사흘쯤 깎지 않은 듯 까칠했습니다. 저는 그저 IMF로 넘쳐나는 노숙자 일거라 생각했습니다. 노숙자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겨울 외투를 입고 다니곤 하니까요.
당신은 손때가 묻은 작은 쇼핑 백 하나를 들고 천천히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놀라서 우뚝 멈추어 섰지요. 하지만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엔 당신의 눈빛이 너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유명 백화점이 자리한 지하철 역 부근이어서 수많은 행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당신과 제가 있는 공간만은 그 많은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일 공간이면서도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 같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무슨 일이지요?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십 년 이상이나 하고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발음이 약간 서툴렀을 겁니다.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지요.
저......
당신은 잠시 주저하더니 쇼핑백을 뒤져 무엇인가를 꺼냈습니다. 약간은 지저분해서 묵은 빨래나 마른 빵 조각이 들어 있을 것 같은 그 쇼핑백에서 나온 물건은 새까만 가죽에 연갈색 털을 두른 반부츠였습니다. 의외였습니다. 너무도 앙증맞고 예쁜 부츠였으니까요.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감촉 때문에 고양이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연갈색 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까칠한 당신의 모습에 경계심이 일었던 것이겠지요.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한 번 신어봐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당신의 부탁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누군가 대신 대답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심히 지나칠 뿐이었지요.
제발 부탁입니다. 금방 벗어도 좋으니 한 번만 신어봐 주십시오.
다시 부탁하는 당신의 눈에는 너무도 절실한 애원의 빛이 담겨 있어서 매정하게 거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손수 신겨 준 그 부츠는 발에 꼭 들어맞았습니다. 그날 따라 검정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옷과도 잘 어울렸고요. 그래도 계속 신고 있기는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부츠를 신은 내 발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른 벗어주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맙습니다, 이 부츠를 신은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라고 말하며 올려다보는 당신의 얼굴을 접하는 순간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 눈물에 담긴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괜히 눈시울이 젖어왔지요. 왜 그러는지 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슬펐던 것뿐이니까요.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으려니 당신은 또 다시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는 말 없이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져 갔지요. 눈물이 그렁한 발자취를 남겨둔 채.... 당신은 그렇게 떠나갔고, 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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