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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 (2)
2005/04/25 00:00
입력 조회수 : 620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2)
그 이후 저는 당신을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새로 들어간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빠서 그랬을 겁니다. 제가 다니는 직장은 인터넷 포탈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나라에 불어닥친 인터넷 열풍으로 인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벤처기업이었지요. 미국에서 관련 분야에 종사했던 저는 핵심 부서인 컨텐츠 기획 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언제인가 때늦게 찾아 온 꽃샘 추위가 세상을 온통 얼어붙게 만든 날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더욱 춥게 느껴지는 날씨였지요.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았던 저는 귀가할 때를 생각해 옷을 두툼하게 차려 입었습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려는 데 문득 당신이 주셨던 반 부츠가 생각났습니다. 낮선 사내에게 받은 것을 신는다는 게 왠지 꺼림칙했지만 부츠가 너무 예뻤고 추위를 지독히 싫어하는 성격 탓에 그냥 신어보기로 했습니다.
신발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부츠를 꺼내려니 그 날의 일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참 희한한 일이었지요. 절실하던 그 눈빛과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은 생생한데, 어째서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을까요?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출근 시간에 쫓겨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서둘러 문을 나서야 했지요.
미국에서 운전은 배웠지만 아직 국내 운전면허를 습득하지 못하고 있던 저는 지하철을 이용해 통근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정말 혼잡합니다. 바쁜 시간이기 때문인지 모두들 조급해하고 인상도 굳어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기도 하던데 이곳은 모두 화난 사람들 같아 조금은 갑갑한 마음도 듭니다.
직장은 삼성역 부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 역이지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빠져 나온 저는 옷깃을 바짝 세운 채 회사를 향해 종종걸음 쳤습니다. 오분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빌딩 숲 사이로 휘돌아 나오는 바람은 참기 힘들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얼마나 추웠던지 히터가 가동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손이 곱아 한 동안 품속에 넣고 있어야 했지요.
이럴 때는 따끈한 자판기 커피가 제격이기에 잔돈을 꺼내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누군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관리파트에서 일하게 된 유민석이라고 합니다.
금방 사우나라도 하고 나온 듯 말끔한 모습에 베이지 색 케주얼 정장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사십 초반의 사내였습니다. 그는 서글서글한-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우울함이 베어있는-눈매에 미소를 담아 보내고 있었지만 새로운 직원이 들어온다는 통보를 받은 기억이 없었던 저는 잠시 동안 당황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이주연씨 얘기는 사장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대단히 유능한 인재라고 칭찬하시더군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건네는 명함에는 '관리 이사'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제야 유능한 대학 후배가 하나 있어서 이사자리 하나를 비워 두었다고 하셨던 사장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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