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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48) 이야기 둘 (20)
2006/03/19 00:00
입력 조회수 : 753
◇웨딩드레스 -돈으로 거래 된 사랑 20
-진석씨와 함께 지내는 걸 어머니에게만 넌지시 알려드렸더니 아버지께 말씀드렸나봐요. 여권을 찢어버리고 집에서 꼼짝도 못하게 해요. 그동안은 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전화도 못했는데, 지금 잠시 외출 하셔서 몰래 하는 거예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식이 돈에 거래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느 부모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
-죄송해요... 어떻게든 나가보려고 했는데... 괜히 진석씨만 고생하시네요.
"아냐, 내가 고생 할거야 없지. 그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것이 왠지 서먹했기 때문이다. 그때 울먹이는 다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는 정말로 나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아버지를 거역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요. 죄송해요. 다른... 사람을 구해 보세요. 진석씨는 훌륭한 분이니까. 저보다 몇 배 나은 사람을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인보다 나은 여자는 없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속에만 있을 뿐 말로 만들어져 나오지를 않는다.
-그런데... 저는... 저는...
그녀는 심하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아버지가 들어온 것 같았다. 커다란 호통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인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끊을게요.
"잠깐만, 다인!"
내가 급하게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조금만 더 일찍 내 감정을 표현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물쭈물하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경멸해 왔었다. 한데 내가 막상 이런 경우를 접하고 보니 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작 말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느라 어느덧 보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전화기를 부숴 버리기라도 했는지 다인은 그 날 이후 아무런 연락도 취해오지 않았다.
기다림...
글 안에서는 많이 다루어 보았지만 현실의 나는 단 한번도 누군가를 위해 이만큼 기다려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힘들다. 그녀의 음식에 길들여진 입은 다른 음식을 삼켜도 맛을 알지 못하고, 그녀의 뒷바라지에 길들여진 몸은 모든 것이 귀찮고 힘들게만 느껴진다.
이런 것인가? 세상의 모든 사내들은 이런 것 때문에 한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일까? 문득 궁금증이 일지만 그렇다, 아니다, 대답할 수가 없다. 섹스의 상대가 아닌 진정한 가치로서의 여자를 보는 눈으로 따지자면 나는 이제야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니 말이다.
내가 여자의 진정한 가치를 논하게 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그동안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은 술을 끊었고, TV 출연도 그만 두었다. 술은 다인을 생각나게 해서 마시지 않고, TV 출연은 소설에 다시 전념하기 위해서 그만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는 더 이상 섹스 상대를 찾아 헤매는 일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육체적인 부데낌에서 오는 말초적인 쾌감은 순간이며, 그 끝이 공허함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대신 영혼이 만족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항구적인 쾌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답은 아마도 다인에게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 자신에게 있을 지도...
백산
수정일 2003년 05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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