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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 개의 소품] 이야기 하나(7)
2005/06/02 00:00
입력 조회수 : 688
◇까만색 반부츠-누군가를 대신한 사랑 (7)
다음날 아침, 저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며 힘겹게 눈을 떴습니다. 두 번째 술집 이후의 기억은 전혀 나는 것이 없는데, 용케도 제 침실에 누워 있더군요. 저는 일단 안도하며 두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입에 물었습니다. 그때 식탁 위에 뭔가 낯선 것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숙취 제거용 드링크제와 반듯하게 접혀진 메모 쪽지였습니다.
-두통과 갈증이 심할 겁니다. 술을 많이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과음을 한 경우는 특히 심하지요. 이걸 마시고 다시 한 잠 푹 주무십시오. 사장님께는 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그럼... 나를 침대에 눕혀준 사람이...
저는 본능적으로 옷매무새를 살폈습니다. 많이 구겨지기는 했지만 지난밤에 입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란 참 이상하지요? 안도의 한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론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대로 그 날 하루를 온전히 쉬었습니다.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한 뒤 허리가 아플 때까지 늦잠을 자고,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휴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누군가에게 들었던-어쩌면 책에서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볼 때이다. 너무 급히 달리느라 혹시 놓치고 온 것이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전진을 잠시 미뤄두고 되돌아가 그것을 주워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최종의 행복일지도 모르니까.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말이었지만, 그 날은 특히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토스트를 한 쪽 구워 입에 물고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쉼표가 없는 긴 문장처럼 숨가쁘게 달려온 날들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발갛게 입을 벌린 석류처럼 속이 꽉 찬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살짝 깨물면 톡, 터지는 석류 알갱이처럼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지닌,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런 것. 바로 사랑이라는 솜사탕 말입니다.
불타오르는, 혹은 폭발 할 듯 격렬한 사랑은 차치하더라도, 그 흔한 사춘기의 짝사랑이나, 스치는 사랑조차 해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내의 얼굴 하나 없는 삭막한 청춘시절이라니... 참 한심하더군요. 어쩌면 제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괜히 우울해진 저는 진열장에 있던 위스키를 한 병 꺼냈습니다. 치즈 한 쪽과 잔을 챙겨 다시 침대로 돌아오며 창 밖을 보니 어느새 어둑해지는 시간이더군요. 커튼을 활짝 열자 저녁을 마친 사람들이 산책 나온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30평 미만의 작은 평수가 주류를 이루는 서민용 아파트 단지였기에 대부분이 아이들과 함께 나온 젊은 부부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습니다. 전날 과음을 해서인지 통증에 가까운 짜르르한 자극이 전해 왔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창 밖 저 아래쪽 사람들은 한결같이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는 공간만은 정적으로 물들어 있었지요. 이런 기분은 누구나 가끔 느끼는 것일 겁니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데 나 홀로 정막함 속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 말입니다.
저는 씁쓸히 웃으며 위스키를 다시 한 잔 마셨습니다. 그렇게 두어 잔 더 마시고 취기가 천천히 오를 때쯤이었습니다. 정적을 깨는 초인종 소리가 울려왔습니다. 불도 켜지 않고 홀로 쪼그려 앉아 있던 저는 크게 놀라 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기에 연락도 없이 저를 찾아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부산에 사시고, 서울에도 친구가 두세 명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다 바쁜 처지여서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예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잠옷 차림이었던 저는 황급히 가운을 걸치며 현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누구세요?
유민석입니다.
방문자는 놀랍게도 당신이었습니다.
백산
수정일 2002년 8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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