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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젖어있는 열한개의 소품] (36) 이야기 둘 (8)
2005/12/27 00:00
입력 조회수 : 630
◇웨딩드레스 -돈으로 거래 된 사랑 8
매일 이렇게 즐겁기만 하다면 결혼도 한 번 해볼 만한 것 아닌가? 요즘은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 웃기는 얘기다. 내가 결혼을? 하하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여자를 주체못할 성 에너지의 분출구로만 여기는 내게 결혼이라니... 십만 원 권 수표 한 장에 순결을 바치고 훌쩍거리던 가출 소녀가, 백만 원 권 수표를 흔들며 색다른 경험을 요구하는 내게 이색적인 서비스를 해주느라 밤새도록 시달렸던 직업 여성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시쳇말로 주접떨지 말라고 쏘아붙이겠지. 하긴 나를 거쳐갔던 수많은 여자들이라면 내가 결혼한다는 얘기를 믿느니 강아지가 고양이를 사랑하더란 얘기를 믿을 것이다.
휴우... 그런데 요즘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심란한 것일까? 쓸데없이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뭐가 잘 못 된 것이지? 괜한 잡생각을 하느라 방송 도중에 실수하기 일쑤이고, 두 달이 넘도록 새로운 작품은 시작도 못하고 있으니... 이러다가 방송이고 소설이고 다 끝장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가만... 두 달이 넘도록? 그러면 혹시...
이런! 다인이 서울에 온지가 벌써 100일이나 됐군. 한 달 기념으로 외식하고 웨딩드레스를 사 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0일이라니... 세월의 체감 속도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고 당시의 삶이 만족스러울수록 빨라진다는 옛 말이 실감나는군.
어쨌거나 간소한 축하연이라도 열어야겠는걸? 요즘 신세대들은 만난지 100일 되는 날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성대한 이벤트를 준비한다고들 하던데...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이런 현상이 신세대들의 조급증을 대변하는 경우라며 떨떠름한 눈길을 보내지만, 이런 풍조도 알고 보면 기성세대들의 산물임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100일 기념 풍조는 신병에게 입소 100일 기념 휴가를 내주는 군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벤트를 준비해야 다인과 내가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한참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괜히 옆구리가 뜨끔뜨끔하다. 그래서 옆을 힐끗 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박PD가 도끼눈을 뜬 채 노려보고 있다.
"김 작가, 요즘 대체 왜 그래요? 건 듯 하면 방송 도중에 멍한 표정이나 짓고 있고... 지금 김 작가 멘트 할 차례잖아요."
"하하... 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그만..."
"지금이야 연습이니까 괜찮다 쳐도 방송 중에 자꾸 그러면 정말 곤란해 져요!"
"알겠습니다. 조심하도록 하지요."
내가 다시 사과를 하는데도 박PD 자식은 대꾸도 안 한 채 고개를 돌려버린다.
"자자, 다시 한 번 합시다. 30분 뒤에 방송 시작이니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요."
출연진들을 둘러보며 소리치던 박PD는 나를 돌아보며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김 작가는 특히 조심하세요."
정말 더러워서... 이 참에 방송을 확 때려치워 버릴까? 하는 생각이 확 치밀어 오르지만 우선은 꾹 눌러 참는다. 때려치울 때 때려치우더라도 안방 TV에 비치는 내 모습이 뚱해 보이면 안 되니까.
짜여진 각본을 마치 그 자리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이야기 인양 연극 해내는 MC들, 무대 아래서야 어찌 되었든 무대 위에서만큼은 더 없이 화려하고도 순결해 보이려고 애쓰는 스타 연예인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연극에 몰입해 광란하는 방청석의 십대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하지만 나도 그 안의 한 사람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
하기는... 삶 자체가 위선의 연속이니 그것을 연극하는 우리들이나, 이를 보고 환호하는 방청객이 잘못 됐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극히 정상적이라고 해야겠지.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녀 댄싱그룹의 섹시한 안무와 이에 호응하는 방청객의 열기로 오늘의 방송도 마무리되어간다. 그리고 나는 다인과의 100일 기념 이벤트에 골몰해간다.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는 즐거운 하루가 될까?
백산
수정일 2003년02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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